가례/경주최씨

경주 덕천리 유적과 돌산 고허촌과 소벌도리

docstory 2017. 2. 8. 17:27

신라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기원전 57, 천상(天上)에서 강림한 박혁거세가 건국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혁거세는 지금의 경주지역 산곡간(山谷間) 할거하던 사로 6(斯盧六村) 우두머리들인 6촌장(村長)들에게 옹립되어 신라를 세우고 초대왕이 되었다.

혁거세를 추대한 6촌과 촌장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신라 건국신화 부분에 실명이 모두 공개되고 있다. 이를 종합하면 첫째가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고, 둘째가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嘴山) 진지촌(珍支村), 넷째가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가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다.

이들 6촌은 나중에 () 바뀌게 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 건국기에서는 사로 6촌이 발전한 6부를 '진한 6'(辰韓六部) 부르고 있다. 6 이름 또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전하는데, 미세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략은 일치한다

기록에 의하면 돌산 고허촌은 촌장이 소벌(蘇伐) 혹은 소벌도리(蘇伐都利)였다. 6촌장 중에서도 소벌도리는 혁거세 옹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고허촌장 소벌도리가 어느 양산 기슭을 바라보다가 나정(蘿井) 옆에서 아이를 발견하니 그가 바로 혁거세였다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이에 더해 소벌도리 또한 형산(兄山)으로 강림했다고 덧붙인다. 형산이란 서형산(西兄山), 선도산(仙桃山)이라고도 부르는 산으로, 중국 황실의 딸인 혁거세 어머니가 중국을 떠나 정착한 곳이며, 김유신의 큰누이 동생 보희(寶姬) 방뇨하는 꿈을 장소로도 유명하다

기록들이 비록 신화 혹은 전설이라는 성격을 벗어버리기 힘들지만 돌산 고허촌이란 곳이 사로 6 중에서도 사실상 신라의 탄생지라는 흔적을 가장 농후하게 남기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돌산 고허촌은 나중에 () 바뀌어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는데, 사량부(沙梁部) 그것이다. 사량부를 무대로 저명한 족적을 남긴 신라사의 인물로는 신라말기의 대학자 최치원이 있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는 김유신 집안이 대대로 정착해 생활한 곳도 이곳이다

김유신은 6 어느 출신인지 기록이 없으나, 그의 조부인 김무력(金武力) 사량부 출신이라는 사실이 신라 진흥왕 시대 몇몇 금석문에 보이는 데다, 무력의 고손자이자, 김유신의 조카인 김반굴(金盤屈) 또한 사량부 출신이라는 사실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사량부 출신임이 확실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사량부는 고려건국 직후에는 남산부(南山部) 되었다. , 사량부는 돌산 고허촌을 모태로 해서 사로 6 하나가 되었다가 고려시대에는 남산부로 바뀐 셈이 된다.

사량부, 나아가 돌산 고허촌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는 논란이 없지 않으나, 최근 1-4세기 대규모 고분군이 발견된 경주시 내남면 덕천리 일대를 포함했다는 데는 학계에서 이견이 거의 없다

신라가 공식적으로 건국되기 경주시 지역의 6 고허촌(高墟村) 촌장이었다. 훗날 신라 6 사량부의 시조가 됐다. 이름의 '소벌' 신라의 이름인 서라벌과 같은 어원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서는 6 촌장이 사람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데, 학계에서는 앞서 멸망한 고조선 유민 세력들이 한반도 남부로 남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박혁거세 탄생 설화에서는 소벌도리가 나정에서 혁거세의 알을 처음 발견하고, 10살까지 집에서 키우며 나중에 왕으로 추대할 때도 주도적 역할을 한다. 설화적 윤색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혁거세 집단이 즉위하고 신라의 원형이 만들어지는 데서도 6 가장 공을 세운 후원세력의 우두머리로 있다.

"어느 고허촌장 소벌공(혹은 소벌도리)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곁의 사이에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그래서 보니 갑자기 말은 보이지 않고 알이 한개 있어 깨뜨려보니 아이가 나왔다. 소벌공은 아이를 데리고 와서 길렀는데, 10여세가 되자 유달리 숙성하였다. 6 사람들은 아이의 출생이 신기했으므로 모두 우러러 받들어 왕으로 모셨다. 진한 사람들은 표주박을 ()이라고 하였는데, 혁거세가 커다란 알의 모양이 표주박 같이 생겨서 성을 박으로 하였다."삼국사기

소벌도리(蘇伐都利)의 아들 최대벌리(崔大伐利) 혈통으로 소벌공(蘇伐公) 소벌도리(蘇伐都利)로부터 24세손(世孫) 최치원(崔致遠)이 경주 최씨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최성의 원조 소벌도리(崔姓 元祖 蘇伐都利)

최씨의 득성(得姓)을 한 원시조(元始祖)이시며, 신라 개국공신으로 양자(養子) 혁거세왕(赫居世王)과 더불어 신라(新羅) 천년사직(千年社稷)을 이루며 오늘날 찬란한 문화와 화랑정신을 만대에 계승 발전시키신 분이다.


년원(淵源)


진한의 소벌도리와 최씨(辰韓 蘇伐都利 崔氏)

최씨는 우리 겨레 가운데서도 가장 역사를 지닌 씨족의 하나로 역사상 숱한 명신 열사, 학자, 문인을 배출한 라조(羅朝) 이래의 전통 있는 명문으로 손꼽히는 삼한갑족(三韓甲族)이다.

우리 동방에서 최씨 내력을 알고자 하면 먼저 소벌공부터 알아야 한다. 소벌공은 본명이 소벌도리이니 그 당시 진한의 방언으로 지은 것이요, 후에 역사기록에서 소벌공이라 명칭하였지만 소벌은 성씨가 아니요, 부르기 쉬운 약칭인 것이다 그 당시 소벌도리는 한갓 이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지위를 보아서 후세인이 공()자를 붙여 존칭한 것이요 당시 제도로 보아 이름자만 호칭한 것이다 소벌공은 지금으로부터 약 2천백 여년 전 사람으로 삼국유사에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듯이 기록이 있으나 사기(삼국사기 동국통감)등 정사에는 그러한 천강설(天降設)은 없고, 다만 진한의 고허촌장 이라고 말하여 어디로부터 왔는지 생래(生來)는 불분명하므로 그를 연구함에는 정사(正史)를 따라 조선의 유민사(遺民史)에서 진한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소벌공은 본래 진한 사람으로 신라를 창건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니 삼국사기, 신라본기 동국통감에서 본 그의 사기는 다음과 같다.


6촌장과 진한(六村長 辰韓)

기원전 57년경 고조선의 북부여 유민들이 동해빈의 여러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촌락을 이르고 있었는데 첫째 마을은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둘째 마을은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셋째 마을은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네째 마을은 취산진지촌(山珍支村 혹은 宇珍村다섯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여섯째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라는 마을들이 있었다.

고조선의 유민이란 단군-기자의 조선임을 말함이요동해의 여러 산골짜기(東海濱山谷間) 지금의 경상북도와 강원도 일부경기도 일부충청도 북부  괴산 이북인 충청북도 전역을 지칭하니 이것이 본래 진한의 위치가 대개 그렇게 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진한이란마한과 변한을 통하여 삼한이라 하였던 것이요 삼한  최초엔 제일 강하였으나 후에 점차 약해짐에 따라 마한이 제일  나라가 되었으니 마한은 이미 한혜재(漢惠宰)2(단기2142)부터진한과 병한  나라를 섭치(攝治) 것으로 보면   나라는 당초에는 통치자(盟主) 있었으나 붕괴되어 다시 일으키지 못했던  같으며 삼국유사에는 병한이 각기 열두개의 소국이 있다 했는데  소국들 자체가 군소 집단으로서 국호를 가지고 생활하여  듯하다.

그러므로 6부의 촌장도 나라의 왕이 없고 백성들만이 각자 나름대로(放逸)살아 가무로 어려운 질서를 근심하게된 것으로도 족히 그때의 형태를   있으며 삼한의 경계를 말하면 진한은 지금의 경기도 일부와 경상도 일부충청도 일부이며 병한은 경상남도  일부로 보는 것이 타당   같다이곳은 후에 수로왕이 금관국(加羅) 세웠다.


소벌공과 신라건국(蘇伐公과 新羅建國)

삼한이 반도남부에 정립하고 있었으나진한은 명실공히 군주국가가 되지 못하고 백성들만이 마한의 침략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 백성들은 항상 국가건설을 계획하고 있던 터 마한의 양왕5(단기2265년한무재(韓武宰원년)임자 어느날 6촌의 고허촌장 소벌공은 다른 촌장들을 소집하여 건국회의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소벌공은 그해 3월 삭일에 양산촌장 알평(謁平), 대수촌장 구례마(俱禮馬), 진지촌장 지백호(智伯虎), 가리촌장 지타(祉陀), 고야촌장 호진(虎珍등 다섯 촌장과 더불어 알천안상에서 회의를 열도록 소벌공이 제안하니 각 촌장들은 이에 모두 찬동하고 각기 자제들을 거느리고 참석하였다소벌공은 이 회의서 의장 격이 되어 말하기를 지금 우리들의 많은 민중이 기름진 좋은 땅에서 태평성대하게 살면서도 우리를 다스릴 어른(君主)이 없는 까닭에 백성이 모두 제멋대로(放逸)하며 살고있으니뭉치고 단합하는 힘을 갖지 못하는 형편이므로항상 남의(馬韓)나라의 부당한 간섭과 제어(制御)를 받게 되고또 인접한 변한(弁韓)도 종종 침해하는 일이 자주 있을 뿐 아니라멀리 북으로부터 한()의 4군이 머리를 누르고 있어 언제나 그것들이 우리의 진전에 크게 방해되는 바인 즉 우리는 지금부터 좋은 군주를 얻어 뫼시고 국가정사를 새롭게 하면 이거야말로 자손만대에 백년대계를 이르게 될 것이니 이를 위해 총력을 다함이 어떠하겠는가고 말하니 모든 촌장과 자제들은 이에 동의함은 물론크게 협력할 것을 결의하게 되었다.

소벌공은 이제 군주를 정하는 것만이 남았는데 어떤 군주를 간택하여 백성들의 축복을 받을까! 하는 생각에 잠긴  높은 언덕에 올라, 6촌의 아름 다음과 기름진 대지를 바라볼 적에 우연히도 이상한 조짐을 발견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발길을 그곳으로 옮기고 있었다그것은 남쪽의 양산  蘿井(계림부근) 수풀 사이로 마치 번개같은 서광이 번쩍거리며  속에서  백마가 꾸물거리고 있는 것이 선명히 보인다이상히 여긴 소벌공은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본  말은 앞발을 꿇어 절하는 모양으로   굽히다가 -소리를 지르더니 하늘로 사라져버리고  자리에는 푸릇 불긋한  (大卵 개가 놓여 있는  아닌가! 소벌공은  알을 얻어 깨어본 이것은  웬일인가!  속에서는  밖에도 동자 하나가 나오는데 형태의용(形態儀容) 대단히 단정하고 아름다음으로 일면 놀라웠고 한편으로는 기이(奇異)함으로 소벌공은 서둘러 얼싸안고  동천(東泉寺=우물사) 가서 목욕을 시키니 아이의 몸에는 광채가 나고  주변의 새들이 날아와 너울너울 춤을 추고 천지가 진동하며 일월이 청명해지는 조짐부터가 심상치 않으므로 공은 좋아서 집으로 데리고  귀중히 기르며  때의 광경을 상징하여 혁거세(赫居世) 하였다혁거세가 13 되던  단기2277 한선재오봉(漢宣宰五鳳)원년에 소벌공은 다시  촌장들을 불러 회의를 열고 혁거세의 자질이 비범함을 자세히 설명한  왕으로 추대할 것을 제의하니  촌장들은 이에 찬동함으로  위에 오르게 하고 국호를 서군벌이라 하니다시 서라벌신라의 일명으로 진한의  땅에  신생국이  것이다신라는 장차   양국을 통일하여 당당한 동해의 대국이  기업을 닦고 천년사직의 융성한 나라가 되었으니 이는 소벌공의 공적이요  촌장들의 보필로 혁거세와 선정이 베풀어 졌음을 뜻한다 중에서도 더욱 소벌공으로 말하면 혁거세가 탄생한 대란을 얻음이라든지여기서 나온 동자를 13 간이나 수양한 관계라 든지 등을 고찰하여 혁거세는  소벌공의 수양아들 격이니 어린 왕을 보좌함에 있어서 실상은 섭정과 같이 국정에 진력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신라의 시조 혁거세왕 19년에(三國遺事변한이 나라를 받쳐 항복해왔고 국기는 더욱 확고해져 가면서 동해의 나라 신라는 대국으로 발전해  것이다참고로 변한 합병시기는 이설이 있다 혁거세 19(서기399) 위군침입  고구려군 5만을 원군으로 임나와 가라를 항복케 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6부에 6성 사성 (6部 6姓 賜姓)

신라의 3대 유리왕은(신라92365) 구 진한의 6부에 지명을 개칭하여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을 양부(梁部 혹은 及梁部),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사량부(沙梁部), 취산진지촌(觜山珍支村)본피부(本彼部),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점량부(漸梁部 혹은 牟梁部),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한기부(漢祇部 혹은 韓祇部),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습비부(習比部)로 하는 동시에 그 6부의 장()에게 각각 성을 내렸으니(사량부(고허촌)의 장 소벌공은 최()씨의 성을 받았다그 외 양산촌 알평에게는 이()대수촌 구례마에계는 손()씨 진지촌 지백호에게는 정()씨 가리촌 기타에게는 배()씨 명활촌 호진에게는 설()씨 이렇게 하여 6부의 6성을 내린 것은 원래 진한의 6촌장이 신라국에 큰공을 세운 연유로 사성(賜姓)이 되었으며 당시 민간으로서는 처음 성을 갖게 된 것이다.

아동반도에서는 단군이래 일반인에게는 성씨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중국에서는 삼황과 오제(三皇五帝때 이미 성이 있었다하여 대허벌 의씨가 풍()염재신농씨가 강()황재헌원씨 공손(公孫)으로 삼황의 각성인 것이다또 오제로는 소호 김천(金天)전욱 고양(高陽)씨 제여 고신(高辛)제요국당()씨가 모두 공손이며 순재유우(有虞)씨 요()씨로 되어 있고 삼대이하로는 말할 것도 없이 사람마다 성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씨 조선이라 하여 기자(箕子)로서 그 성이 기씨라 하되기자도 실은 기 때에 봉한 자작(子爵)이었으므로 기자라 칭한 것이며신라의 소벌공만 하더라도 소벌도리의 4자를 양분하여 머리의 2즉 소벌에다 공자(公字)를 붙혀 소벌공이라 한 것이 마치 소벌씨 같이 보이기도하나 사실 소벌도리는 하나의 이름인 것이지 소벌은 성이요 도리는 이름이었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러므로 유리왕 때 사성이야말로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최초의 성씨라 하겠다.

최씨(崔氏) 조상 소벌도리(蘇伐都利문헌 기록(文獻 記錄)

고허촌(高墟村)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1 혁거세 거서간(赫居世居西干)>조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시조는 () 박씨(朴氏)이고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전한(前漢효선제(孝宣帝오봉(五鳳원년 갑자(기원전 57) 4 병진(또는 정월 15) 즉위하여 거서간(居西干)이라 일컬었다이때 나이는 13세였고 나라 이름을 서나벌(徐那伐)이라 하였다(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曰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이에 앞서 조선(朝鮮) 유민(遺民)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六村) 이루고 있었다첫째는 알천(閼川양산촌(楊山村)이고둘째는 돌산(突山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嘴山진지촌(珍支村), 넷째는 무산(茂山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고야촌(高耶村)인데이것이 진한 6(辰韓六部) 되었다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嘴山珍支村或云干珍村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고허촌(高墟村우두머리 소벌공(蘇伐公)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옆의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어 가서 보니 말은 보이지 않고  알만 있었다그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와 거두어 길렀다나이가 10 세에 이르자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夙成)하였다. 6 사람들은  출생이 신비하고 기이하였으므로 그를 받들어 존경하였는데이때 이르러 그를 임금으로 삼았다진한 사람들[辰人] [] ()이라 일컬었는데처음에  알이 마치 박과 같았던 까닭에 () 성으로 삼았다거서간(居西干) 진한의 [辰言] 왕을 뜻하며혹은 존귀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라고도 하였다 (高墟村長蘇伐公 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跪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收而養之 及年十餘岐寲然夙成 六部人 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 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故 以朴爲姓 居西干 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소벌도리(蘇伐都利) 소벌공(蘇伐公)이라고 하였으며나정(蘿井곁에서 박혁거세(朴赫居世) 발견하고 그가 10 세가  때까지 키운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진주 소씨(晋州蘇氏) 그를 원조(遠祖) 섬기고 있다그러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진주 소씨(晋州蘇氏) 시조는 고려 말기의 상호군(上護軍소희철(蘇希哲) 되어 있다또한 소벌도리(蘇伐都利) '()' 성씨라는 기록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없으며, '소벌(蘇伐)' 신라의  명칭인 서라벌을 약칭한 것이고 '도리' '집단', '두레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1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조에 다음 글이 있다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 9 봄에 6(六部) 이름을 고치고 그들에게 각각 () 주었다양산부(楊山部) 양부(梁部) 고치고  성을 이씨(李氏) 하였으며고허부(高墟部) 사량부(沙梁部) 고치고  성을 최씨(崔氏) 하였으며대수부(大樹部) 점량부(漸梁部牟梁部) 고치고  성을 손씨(孫氏) 하였으며간진부(于珍部) 본피부(本彼部) 고치고  성을 정씨(鄭氏) 하였으며가리부(加利部) 한비부(漢祈部) 고치고  성을 배씨(裴氏) 하였으며명활부(明活部) 습비부(習北部) 고치고  성을 설씨(薛氏)라고 하였다 (九年  改六部之名 仍賜姓 楊山部爲梁部 姓李 高墟部爲沙梁部 姓崔 大樹部爲漸梁部(一云牟梁姓孫 于珍部爲本彼部( 新本作干姓鄭 加利部爲漢祈部 姓裴 明活部爲習北部 姓薛)”. 

 기록을 보면 소벌도리(蘇伐都利) 후손인 고허부(高墟部) 사량부(沙梁部) 고치고 그들에게 최씨(崔氏성을 주었다고 되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1 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赫居世王)>조에는 소벌도리(蘇伐都利)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한(辰韓땅에는 예로부터 여섯 () 있었으니, …… 2. 돌산(突山고허촌(高墟村)이니 촌장(村長)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처음 형산(兄山) 내려왔으니 사량부(沙梁部  읽는다 涿으로 쓰나 역시  읽는다정씨(鄭氏) 조상이 된다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고 하는데 구량벌(仇梁伐)ㆍ마등오(麻等烏)ㆍ도북(道北)ㆍ회덕(廻德 남촌(南村) 이에 속한다(지금이라고  것은 고려 태조가  것이니 다음도 같다). …… 4. 취산 진지촌(珍支村ㆍ혹 賓之 하며  賓子 또는 氷之라고도 한다)이니 촌장(村長) 지백호(智伯虎)처음 화산(花山)에서 내려왔으니 이는 본피부(本彼部최씨(崔氏) 조상이 되었다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고 하는데 시파(柴杷 동남촌(東南村) 이에 속한다최치원(崔致遠)  본피부(本彼部사람이었다지금 황룡사(黃龍寺남쪽과 미탄사(味呑寺남쪽에  터가 있어 최후(崔侯)  집이라 하니 분명하다.”(辰韓之地 古有六村 …… 二曰突山高墟村 長曰蘇伐都利 初降于兄山 是爲沙梁部梁讀云道 或作涿亦音道鄭氏祖今曰南山部仇良伐 麻等烏 道北 廻德 等南村屬焉稱今曰者 太祖所置也下例知> …… 四曰山珍支村一作賓之又賓子 又氷之>, 長曰智伯虎 初降于花山 是爲本彼部崔氏祖 今曰通仙部 柴巴等東南村屬焉 致遠乃本彼部人也今皇龍寺南味呑寺南有古墟 云是崔侯古宅也)

 ‘삼국유사(三國遺事)’ 기록에는 진지촌(珍支村촌장(村長지백호(智伯虎) 최씨(崔氏)고허촌(高墟村촌장(村長소벌도리(蘇伐都利) 정씨(鄭氏) 되어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기록과는 정반대다그런데 정씨(鄭氏) 경주(慶州)ㆍ고성(固城)ㆍ공산(公山)ㆍ광주(光州)ㆍ금성(錦城 40 본이 전하며중국에서 귀화한 경우인 서산 정씨(瑞山鄭氏) 낭야 정씨(瑯揶鄭氏) 제외한 정씨(鄭氏) 대부분은 신라 6부의 진지촌(嘴山珍支村촌장 지백호(智伯虎) 도시조(都始祖) 하고 있다.

최씨 분파도(崔氏 分派圖)

문헌에 의하면 우리 나라 최씨(崔氏)387()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거의가 지명이고 실제 시조(始祖)가 분명하게 확인된 것은 43본이다. ‘경주최씨상계세보(慶州崔氏上系世譜)’소벌도리(蘇伐都利)로부터 24세손(世孫) 최치원(崔致遠)의 윗대에서 분파(分派)된 본관으로 개성(開城)ㆍ동주(東州·철원)ㆍ전주(全州·군옥파)가 있고, 최치원(崔致遠)의 후대에서는 함양(咸陽)ㆍ청주(淸州)ㆍ영흥(永興)ㆍ충주(忠州)ㆍ용강(龍崗)ㆍ수원(水原)ㆍ부안(扶安)ㆍ강릉(江陵)ㆍ강화(江華)ㆍ화순(和順)ㆍ통천(通川)ㆍ양천(陽川)ㆍ원주(原州)ㆍ해주(海州)ㆍ진주(晋州)ㆍ탐진(耽津)ㆍ전주(全州·순작, )을 기록하고 있다. 거의 모든 최씨(崔氏)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경주 최씨(慶州崔氏)를 원조(元祖)로 하여 소벌도리(蘇伐都利)와 그로부터 24세손(世孫)인 최치원(崔致遠)을 잇는 같은 후예임이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

득성조 소벌도리(得姓祖 蘇伐都利 2(대벌리(大伐利 3(소벌리(小伐利 4(대평(大平 5(호빈(  6(광윤(桄允 7(() – ()  8(( 9(()  10(( 11(() – 동지나(東之奈 12(( 13(( 14(( 15(은의(殷義 16(서봉(瑞鳳 17(혜양(惠陽 18(태임(太壬 19(동웅(東雄 20(형공(亨公) – 형일(亨一 21(림분(林芬 22(계양성(桂陽聖) – 계양현(桂陽賢)[전주全州(완산完山초계草溪광양光陽양천陽川금천衿川)(강릉江陵), (곡강曲江순천順川영천永川), 흥해興海황주黃州안동安東]  23(견일(肩逸)산윤(山允) 산두(山斗)[삭녕朔寧一派]  - 리정(利貞)[낭주朗州철원鐵原전주全州동주東州상원祥原一派]  24(경주최씨(慶州崔氏)시조(始祖치원(致遠) 서원(棲遠)  25(은함(殷含) 도함(道含)[계림鷄林해주海州(아산牙山용궁龍宮용주龍州죽산竹山청송靑松), 탐진耽津 (나주羅州강진康津괴산槐山). 진주晋州一派 26(승로(承老) 윤로(胤老 27(() – ()[강릉江陵(간성杆城), (강화江華). 통천通川화순和順원주原州태인泰仁우봉牛峰一派] - ()[청주淸州(용강龍岡부안扶安). 양주楊州수원水原함양咸陽밀양密陽광주廣州고부古阜一派] - ()[연풍延豊직산稷山무주茂珠문경聞慶一派]  28() [덕분(德芬 29(( 30(성유(聖楡 31()] 제안(薺顔) 선지(善之)영흥永興월성月城一派】


최씨(崔氏)의 기원은 박혁거세 탄생 전설에 나오는 신라 6부 촌장중의 한사람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로 하늘에서 형산(兄山)으로 내려왔으며, 32년(신라 유리왕 9) 최씨로 성을 하사 받은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 삼국유사에는 소벌도리가 정(鄭)씨의 조상으로 되어있으며, 진주소씨(蘇氏)도 소벌도리를 시조로하고 있다.


그러나 최씨(崔氏)의 실질적인 시조는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이며 소벌도리의 24세손인 최치원(崔致遠)이며, 최치원의 윗대에서 개성, 삭녕, 동주(철원), 전주(최군옥) 등의 본관으로 나위어지고 최치원을 1세조로 하는 경주 최씨에서 최치원의 첫째 아들 최승로(崔承老)의 후손에서 함양, 청주, 충주, 영흥, 용강, 수원, 부안, 강릉, 강화, 화순, 통천, 양천, 원주 등으로 분관이 되었고 지손에서 해주, 진주, 탐진, 전주(최균) 등으로 분관했다.

최씨는 경주 최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해주 최씨, 우봉 최씨 등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전주 최씨와, 동주 최씨도 상당한 세력을 펼쳤으나 최씨는 조선시대보다 신라, 고려시대에 세력을 떨쳤다.


그밖에 김씨에서 최씨로 성을 하사받은 수성최씨와 중국의 귀화 성씨인 충주최씨가 있다.


천룡사(天龍寺)   


동도(東都)의 남산 남쪽에 한 봉우리가 솟아 있다. 우리말로는 수리산〔高位山〕이라고 한다. 그 산의 양지쪽에 절이 있으니 속칭으로 수리사〔高寺〕 혹은 천룡사(天龍寺)라고 한다.


《토론삼한집(討論三韓集)》에 이르기를, 계림(鷄林) 땅에 딴 곳에서 흘러온 두 물줄기와 거슬러 흐르는 한 물줄기가 있는데, 그 거슬러 흐르는 물과 딴 곳에서 흘러온 물의 두 근원이 하늘의 재앙을 진압하지 못한다면 천룡사가 뒤집혀 무너앉는 화를 맞게 된다고 했다.


만간에 전해 이르기를, 거슬러 흐르는 물이란 이 주(州)의 남방 마등오촌(馬等烏村)의 남으로 흐르는 내가 이 것인데, 또 이물의 근원은 천룡사에 뻗치게 된다고 한다.


중국의 사자 악붕귀(樂鵬龜)가 와서 보고 말했다.


"이 절을 파괴하면 곧 나라가 망할 것이다."


또 서로 전해 이른다. 옛날 이 절의 시주(施主)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이름을 천녀(天女)·용녀(龍女)라 했다. 부모는 두 딸을 위해 절을 세우고, 두 딸의 이름을 따서 천룡사라 했다.


경지(境地)가 이상하며, 불도를 돕는 도량이었는데 신라 말기에 와서 쇠잔하여 파괴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중생사(衆生寺) 관음보살이 젖먹여 기른 최은함(崔殷諴)의 아들은 승로(承魯)였는데, 승로는 숙(肅)을 낳고 숙은 시중(侍中) 제안(齊顔)을 낳았다. 제안은 이 절을 고쳐 수축하여 없었던 절을 일으켜, 이에 석가만일도량(釋迦萬日道場)을 설치하고, 조정의 명을 받아 다시 신서(信書)의 원문까지 절에 남겨두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자 절을 지키는 신이 되었는데,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함을 나타내었다.


그 신서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시주인 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주국(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柱國) 최제안은 쓴다.


동경(東京) 고위산의 천룡사는 쇠잔하고 파괴된지 여러 해나 되었으므로, 제자는 특히 성수(聖壽)가 무강(無疆)하시고 국가가 편안·태평하기를 원하여 전당(殿堂), 낭각(廊閣)과 방사(房舍), 주고(廚庫)를 모두 이룩하고 돌부처 이소불(泥塑佛) 몇 구를 만들어 석가만일도량을 새로 설치했다. 이미 나라를 위해 수리하여 세웠으니, 관가에서 주지를 명함이 역시 옳겠으나, 주지를 교대할 때에는 도량의 승려들이 안심할 수 없다. 납입전(納入田)으로 사원을 충족함을 보면, 팔공산 지장(地藏寺)와 같은 절은 납입전이 200결이었고, 비슬산 도선사(道仙寺)는 20결이었고, 서경(西京) 사면의 산사(山寺)도 각기 20결이었으나, 모두 유직·무직을 막론하고, 모름지기 계(戒)를 갖추고 재주가 뛰어난 이를 뽑아서 절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여러 차례 주지로 삼아 분향수도(焚香修道)함을 상례로 삼아왔다.


제자는 이 풍습을 듣고 기뻐하여 우리 천룡사에서도 또한 절의 많은 승려 가운데서 재주와 덕이 뛰어난 고승을 뽑아서 동량(棟梁)으로 삼아 주지로 임명하여 길이 분향수도하게 하려 한다. 문자로 자세히 기록하여 강사(剛司)에 맡겨두니 당시의 주지를 처음으로 삼아 유수관(留守官)의 공문을 받아 도량의 여러 승려들에게 보일 것이다. 승려들은 각기 알아두어야 한다.


중희(重熙) 9년 6월 일, 관직을 갖추어 앞과 같이 서명했다. 살펴보면, 중희는 거란 흥종(興宗)의 연호니 고려 정종 6년 경진(1040)이다.


三國遺事卷第三 塔像第四 091 천룡사(天龍寺)


東都南山之南(동도남산지남) : 동도(東都)의 남산(南山) 남쪽에 


有一峯屹起(유일봉흘기) :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데 


俗云高位山(속운고위산) : 세속(世俗)에서는 고위산(高位山)이라 한다. 


山之陽有寺(산지양유사) : 산 남쪽에 절이 있는데 


俚云高寺(리운고사) : 속칭(俗稱) 고사(高寺), 


或云天龍寺(혹운천룡사) : 또는 천룡사(天龍寺)라고 한다.


討論三韓集云(토론삼한집운) : <토론삼한집(討論三韓集)>에는 이렇게 말했다. 


鷄林土內有客水二條(계림토내유객수이조) : "계림(鷄林)에는 두 줄기의 객수(客水)와 


逆水一條(역수일조) : 한 줄기의 역수(逆水)가 있는데 


其逆水客水二源(기역수객수이원) : 그 역수와 객수의 두 근원이 


不鎭天災(불진천재) : 천재(天災)를 진압하지 못하면 


則致天龍覆沒之災(칙치천룡복몰지재) : 천룡사(天龍寺)가 뒤집혀 무너지는 재앙이 생긴다."


俗傳云(속전운) : 속전(俗傳)에는 이렇게 말한다. 


逆水者州之南(역수자주지남) : "역수는 이 고을 남쪽 


馬等烏村南流川是(마등오촌남류천시) : 마등오촌(馬等烏村)의 남쪽을 흐르는 내가 이것이다. 


又是水之源致天龍寺(우시수지원치천룡사) : 또 이 물의 근원이 천룡사에서 시작되는데, 


中國來使樂鵬龜來見云(중국내사락붕귀내견운) : 중국에서 온 사자(使者) 악붕귀(樂鵬龜)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破此寺(파차사) : '이 절을 파괴하면 


則國亡無日矣(칙국망무일의) : 이내 나라가 망할 것이다.'"


又相傳云(우상전운) : 또 서로 전하는 말에는 이렇게 말했다. 


昔有檀越(석유단월) : "옛날 단월(檀越)이 있었는데 


有二女(유이녀) : 딸 둘이 있어서 


曰天女龍女(왈천녀용녀) : 이름을 천녀(天女)·용녀(龍女)라 하였는데, 


二親爲二女創寺因名之(이친위이녀창사인명지) :


부모가 두 딸을 위해서 절을 세우고 딸들의 이름을 인하여 그 이름을 지었다."


境地異常助道之場(경지이상조도지장) : 이곳은 경지(境地)가 이상하고 불도(佛道)를 돕는 곳이었는데 


羅季殘破久矣(라계잔파구의) : 신라 말년에 파괴되어 이미 오래되었다. 


衆生寺大聖所乳(중생사대성소유) : 중생사(衆生寺)의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젖을 먹여 키운 


崔殷諴之子承魯(최은함지자승로) : 최은함(崔殷함)의 아들 승로(承魯)가 


魯生肅(로생숙) : 숙(肅)을 낳고 


肅生侍中齊顔(숙생시중제안) : 숙(肅)이 시중(侍中) 제안(齊顔)을 낳았는데, 


顔乃重修起廢(안내중수기폐) : 제안(齊顔)이 이 절을 중수(重修)하여 없어졌던 절을 일으켰다. 


仍置釋迦萬日道場(잉치석가만일도량) : 이에 석가만일도량(釋迦萬日道場)을 설치하고, 


受朝旨(수조지) : 조정의 명을 받았으며, 


兼有信書願文(겸유신서원문) : 다시 신서(信書)와 원문(願文)까지 


留于寺(유우사) : 절에 남겨 두었다. 


旣卒(기졸) : 그는 세상을 떠나자 


爲護伽藍神(위호가람신) : 절을 지키는 신(神)이 되어 


頗著靈異(파저령이) :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을 많이 나타냈다.


其信書略曰(기신서략왈) : 그 신서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檀越內史侍郞(단월내사시랑) : "단월인 내사시랑 


同內史門(동내사문) : 동내사문 


下平章事(동내사문하평장사) : 하평장사 


柱國崔齊顔狀(주국최제안장) : 주국 최제안(崔齊顔)은 쓰노라. 


東京高位山天龍寺殘破有年(동경고위산천룡사잔파유년) :


경주(慶州) 고위산(高位山)의 천룡사가 파괴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弟子特爲聖壽天長民國安泰之願(제자특위성수천장민국안태지원) :


이에 제자 최제안은 특별히 성수(聖壽)가 무강하시고 국가가 편안하고 태평하기를 원해서 


殿堂廊閣(전당랑각) : 전당(殿堂)·낭각(廊閣)과 


房舍廚庫(방사주고) : 방사(房舍)·주고(廚庫)를 


已來興構畢具(이래흥구필구) : 모두 갖추어 이룩하고, 


石造泥塑佛聖數軀(석조니소불성수구) : 또 석조불(石造佛)과 이소불상(泥塑佛像) 몇 개를 만들어 


開置釋迦萬日道場(개치석가만일도장) : 석가만일도량을 열었다


旣爲國修營(기위국수영) : 이미 국가를 위해서 수리하여 세웠으니 


官家差定主人亦可(관가차정주인역가) : 조정에서 절의 주지(住持)를 정해 보내는 것이 옳은 일이다. 


然當遞換交代之時(연당체환교대지시) : 하지만 이 주지를 교대할 때에는 


道場僧衆不得安心(도장승중불득안심) : 도량(道場)의 중들이 안심하고 지낼 수가 없다. 


側觀入田稠足寺院(측관입전조족사원) : 희사(喜捨)한 토지를 가지고 사원(寺院)을 충족하게 하는 것을 보면, 


如公山地藏寺入田二百結(여공산지장사입전이백결) :


팔공산(八公山)의 지장사(地藏寺)와 같은 절은 희사한 토지가 200결(結)이었고, 


毗瑟山道仙寺入田二十結(비슬산도선사입전이십결) : 비슬산(毗瑟山)에 있는 도선사(道仙寺)는 20결이었고, 


西京之四面山寺(서경지사면산사) : 서경(西京) 사면에 있는 산사(山寺)들도 


各田二十結例(각전이십결례) : 각기 20결씩이었으며, 


皆勿論有職無職(개물논유직무직) : 이들은 모두 유직(有職)·무직(無職)을 물론하고 


須擇戒備才高者(수택계비재고자) : 모름지기 계(戒)를 갖추고 재주가 높은 이를 뽑아서 


社中衆望(사중중망) : 절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連次住持焚修(련차주지분수) : 여러 차례를 계속하여 주지로 삼아 분향(焚香)하고 도 닦는 것을 


以爲恒規(이위항규) : 상례(常例)로 삼았다. 


弟子聞風而悅(제자문풍이열) : 제자 제안(齊顔)은 이 풍습을 듣고 기뻐하여 


我此天龍寺(아차천룡사) : 우리 천룡사에서도 


擇選才德雙高大德亦於社衆之中(택선재덕쌍고대덕역어사중지중) :


역시 절의 많은 중들 가운데서 재주와 덕이 함께 뛰어난 고승으로 


兼爲棟梁(겸위동량) : 동량(棟樑)이 될 만한 사람을 뽑아서 


差主人鎭長焚修(차주인진장분수) : 주지로 삼아 길이 분향(焚香) 수도(修道)하게 하고자 한다. 


具錄文字(구록문자) : 이에 갖추어 글로 기록하여 


付在剛司(부재강사) : 강사(剛司)에게 맡겨 두는 것이니 


自當時主人爲始(자당시주인위시) : 이때부터 비로소 주지를 두게 되었다. 


受留守官文通(수류수관문통) : 유수관(留守官)은 공문(公文)을 받아 


示道場諸衆(시도장제중) : 도량의 여러 중들에게 보여 


各宜知悉(각의지실) : 모두를 각각 알도록 할 것이다. 


重熙九年六月日(중희구년육월일) : 중희(重熙) 9년 6월 일에 


具銜如前署(구함여전서) : 관직(官職)을 갖추어 위와 같이 서명(署名)한다."




按重熙乃契丹興宗年號(안중희내계단흥종년호) : 상고해 보면 중희(重熙)는 거란 흥종(興宗)의 연호이며, 


本朝靖宗七年庚辰歲也(본조정종칠년경진세야) : 본조(本朝) 정종(靖宗) 7년인 경신년(104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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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공식적으로 건국되기 전 경주시 지역의 6촌 중 고허촌(高墟村)의 촌장이었다. 훗날 신라 6부 중 사량부의 시조가 됐다. 이름의 '소벌'은 신라의 옛 이름인 서라벌과 같은 어원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서는 6촌 촌장이 될 사람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데, 학계에서는 앞서 멸망한 고조선 유민 세력들이 한반도 남부로 남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박혁거세 탄생 설화에서는 소벌도리가 나정에서 혁거세의 알을 처음 발견하고, 10살까지 집에서 키우며 나중에 왕으로 추대할 때도 주도적 역할을 한다. 설화적 윤색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혁거세 집단이 즉위하고 신라의 원형이 만들어지는 데서도 6촌 중 가장 큰 공을 세운 후원세력의 우두머리로 볼 수 있다.


"어느 날 고허촌장 소벌공(혹은 소벌도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곁의 숲 사이에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그래서 가 보니 갑자기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이 한개 있어 깨뜨려보니 한 아이가 나왔다. 소벌공은 그 아이를 데리고 와서 잘 길렀는데, 10여세가 되자 유달리 숙성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 아이의 출생이 신기했으므로 모두 우러러 받들어 왕으로 모셨다. 진한 사람들은 표주박을 박(朴)이라고 하였는데, 혁거세가 난 커다란 알의 모양이 표주박 같이 생겨서 성을 박으로 하였다."《삼국사기》


그의 아들 최대벌리(崔大伐利) 혈통으로 25세손 최치원이 경주 최씨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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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허촌(高墟村)의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제1권 <혁거세 거서간(赫居世居西干)>조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시조는 성(姓)이 박씨(朴氏)이고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기원전 57년) 4월 병진(또는 정월 15일)에 즉위하여 거서간(居西干)이라 일컬었다. 이때 나이는 13세였고 나라 이름을 서나벌(徐那伐)이라 하였다.(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曰>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遺民)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고,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嘴山) 진지촌(珍支村),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인데, 이것이 진한 6부(辰韓六部)가 되었다.(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嘴山珍支村<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고허촌(高墟村)의 우두머리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의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었으므로 가서 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만 있었다. 그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으므로 거두어서 길렀다. 나이가 10여 세에 이르자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夙成)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비하고 기이하였으므로 그를 받들어 존경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그를 임금으로 삼았다. 진한 사람들[辰人]은 박[瓠]을 박(朴)이라 일컬었는데, 처음에 큰 알이 마치 박과 같았던 까닭에 박(朴)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居西干)은 진한의 말[辰言]로 왕을 뜻하며, 혹은 존귀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라고도 하였다.(高墟村長蘇伐公 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則 收而養之 及年十餘岐寲然夙成 六部人 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 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故 以朴爲姓 居西干 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소벌도리(蘇伐都利)를 소벌공(蘇伐公)이라고 하였으며, 나정(蘿井) 곁에서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발견하고 그가 10여 세가 될 때까지 키운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진주 소씨(晋州蘇氏)는 그를 원조(遠祖)로 섬기고 있다. 그러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시조는 고려 말기의 상호군(上護軍) 소희철(蘇希哲)로 되어 있다. 또한 소벌도리(蘇伐都利)의 '소(蘇)'가 성씨라는 기록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없으며, '소벌(蘇伐)'은 신라의 옛 명칭인 서라벌을 약칭한 것이고 '도리'는 '집단', '두레' 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최씨(崔氏)의 조상 소벌도리(蘇伐都利)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제1권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 9년 봄에 6부(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그들에게 각각 성(姓)을 주었다. 양산부(楊山部)는 양부(梁部)로 고치고 그 성을 이씨(李氏)로 하였으며, 고허부(高墟部)는 사량부(沙梁部)로 고치고 그 성을 최씨(崔氏)로 하였으며, 대수부(大樹部)는 점량부(漸梁部ㆍ牟梁部)로 고치고 그 성을 손씨(孫氏)로 하였으며, 간진부(于珍部)는 본피부(本彼部)로 고치고 그 성을 정씨(鄭氏)로 하였으며, 가리부(加利部)는 한비부(漢祈部)로 고치고 그 성을 배씨(裴氏)로 하였으며, 명활부(明活部)는 습비부(習北部)로 고치고 그 성을 설씨(薛氏)라고 하였다.(九年 春 改六部之名 仍賜姓 楊山部爲梁部 姓李 高墟部爲沙梁部 姓崔 大樹部爲漸梁部(一云牟梁) 姓孫 于珍部爲本彼部(于 新本作干) 姓鄭 加利部爲漢祈部 姓裴 明活部爲習北部 姓薛)” 

이 기록을 보면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인 고허부(高墟部)를 사량부(沙梁部)로 고치고 그들에게 최씨(崔氏) 성을 주었다고 되어 있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의 최씨(崔氏)에 관한 부분.


문헌에 의하면 우리 나라 최씨(崔氏)는 387본(本)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거의가 지명이고 실제 시조(始祖)가 분명하게 확인된 것은 43본이다. ‘경주최씨상계세보(慶州崔氏上系世譜)’의 기록으로는 소벌도리(蘇伐都利) 24세손 최치원(崔致遠)의 윗대에서 분파(分派)된 본관으로 개성(開城)ㆍ동주(東州·철원)ㆍ전주(全州·군옥파)가 있고, 최치원(崔致遠)의 후대에서는 함양(咸陽)ㆍ청주(淸州)ㆍ영흥(永興)ㆍ충주(忠州)ㆍ용강(龍崗)ㆍ수원(水原)ㆍ부안(扶安)ㆍ강릉(江陵)ㆍ강화(江華)ㆍ화순(和順)ㆍ통천(通川)ㆍ양천(陽川)ㆍ원주(原州)ㆍ해주(海州)ㆍ진주(晋州)ㆍ탐진(耽津)ㆍ전주(全州·순작, 균)가 분파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최씨(崔氏)가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경주 최씨(慶州崔氏)를 원조(元祖)로 하여 소벌도리(蘇伐都利)와 그의 24세손인 최치원(崔致遠)을 잇는 같은 후예임이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


▲ 득성시조(得姓始祖) 소벌도리(蘇伐都利)로 이어진 최씨(崔氏) 상계보(上系譜). 


突山 高墟村長 蘇伐都利

 

 

2세(2世)

    대벌리(大伐利)

 

3세(3世)

    소벌리(小伐利)

4세(4世)

    대평(大平)

5세(5世)

    호빈(昊 彬)

6세(6世)

    광윤(img6.gif允)

7세(7世)

    조(img10.gif)

8세(8世)

    서(img11.gif)

9세(9世)

    (img12.gif)

10세(10世)

    국(局)

11세(11世)

    무(茂)

12세(12世)

    비(img14.gif)

13세(13世)

    개(img17.gif)

14세(14世)

    경(敬)

15세(15世)

    은의(殷義)

16세(16世)

    서봉(瑞鳳)

17세(17世)

    혜양(惠陽)

18세(18世)

    태임(太壬)

19세(19世)

    동웅(東雄)

20세(20世)

    형공(亨公)

21세(21世)

    림분(林芬)

22세(22世)

    계양성(桂陽聖)

23세(23世)

    산윤(山允)

24세(24世)

    치원(致遠)


최/씨/세/계/분/파/도(崔/氏/世/系/分/派/圖)

 

 득성조(得姓祖)소벌도리(蘇伐都利)님-<2세손>대벌이(大伐利)님-<3세손>소벌이(小伐利)님-<4세손>대평(大平)님-<5세손>호빈(昊彬)님-<6세손>광윤(桄允)님-<7세손>장남(長男)조(厝)님-<8세손>서(屖)님-<9세손>공(𢖷)님-<10세손>국(局)님-<11세손>장남(長男)무(茂)님-<12세손>비(岯)님-<13세손>개(玠)님-<14세손>창(敞)님-<15세손>은의(殷義)님-<16세손>서봉(瑞鳳)님-<17세손>혜양(惠陽)님-<18세손>태임(太任)님-<19세손>동웅(東雄)님-<20세손>장남(長男)형공(亨公)님-<21세손>임분(林芬)님-<22세손>장남(長男)계양성(桂陽聖)님-<23세손>장남(長男)산윤(山允)일명,견일(肩逸)님-<24세손>장남(長男)경주최씨(慶州崔氏)시조(始祖)치원(致遠)님-<25세손>장남(長男)은함(殷含)님-<26세손>장남(長男)승로(承老)님-<27세손>장남(長男)숙(肅)님-<28세손>장남(長男)제안(齊顔)님. 

<27세손>차남(次男)량(亮)님【江陵강릉崔氏일파(諱必達휘필달님.杆城간성崔氏일파諱之洵휘지순님).(諱文漢휘문한님,江華강화崔氏일파).通川통천,和順화순,原州원주,泰仁태인,牛峰우봉崔氏일파】.  

<27세손>삼남(三男)의(儀)님-<28세손>주(周)님【州청주崔氏일파(龍岡용강,扶安부안崔氏일파).楊州양주,水原수원,咸陽함양,密陽밀양,廣州광주,古阜고부崔氏일파.  

<27세손>사남(四男)우(遇)님【豊연풍,稷山직산,茂珠무주,聞慶문경崔氏일파】. 

<26세손>차남(次男)윤로(胤老)님-<27세손>장남(長男)방언(邦彦)님-<28세손>지윤(之潤)님. <27세손>차남(次男)림(琳)님-<28세손>호(昊)님. <27세손>삼남(三男)종지(宗祗)님-<28세손>언(彦)님. 

<25세손>차남(次男)도함(道含)일명,윤순(允順)님【鷄林계림崔氏일파】-<26세손>첨로(添老)님【海州해주崔氏일파(牙山아산,龍宮용궁,龍州용주,竹山죽산,靑松청송崔氏일파),耽津탐진崔氏일파(羅州나주,康津강진,槐山괴산崔氏일파).晋州진주崔氏일파】. 

<28세손>선지(善之)님【永興영흥,月城월성崔氏일파】. 

<24세손>차남(次男)서원(棲遠)님. 

<23세손>차남(次男)산두(山斗)님【朔寧삭녕崔氏일파】-<24세손>인곤(仁滾)님-<25세손>도(道)님-<26세손>창로(昌老)님. 

<23세손>삼남(三男)이정(利貞)님【朗州낭주,鐵原철원,全州전주崔氏일파(群玉휘군옥님)】-<24세손>장남(長男)승우(承佑)님-<25세손>준옹(俊邕)님【東州동주崔氏일파】-<26세손>동무(東武)님. <24세손>차남(次男)우달(佑達)님)님【開城개성崔氏일파】-<25세손>응(凝)님【祥原상원崔氏일파】-<26세손>상(祥)님. 

<22세손>차남(次男)계양현(桂陽賢)님-<23세손>언휘(彦撝)님【全州전주崔氏일파(諱純爵휘순작님.完山완산,草溪초계,光陽광양.陽川양천,衿川금천崔氏일파).(諱阿휘아님.江陵강릉崔氏일파諱欣奉휘흔봉님).(諱均휘균님.曲江곡강,順川순천,永川영천崔氏일파)興海흥해,黃州황주崔氏일파】. <24세손>장남(長男)광윤(光胤)님安東안동崔氏일파】. <24세손>차남(次男)행귀(行歸)님. <24세손>삼남(三男)광원(光遠)님-<25세손>항(沆)님-<26세손>장남(長男)유부(有孚)님-<27세손>공익(公翊)님-<28세손>지(贄)님. <26세손>차남(次男)영부(永孚)님.  

<20세손>차남(次男)형일(亨一)님-<21세손>선경(𤩕敬)님-<22세손>창(昌)님. 

<11세손>차남(次男)동지내(東之奈)님. 

<7세손>차남(次男)지(之)님.


정씨(鄭氏)의 조상 소벌도리(蘇伐都利)

‘삼국유사(三國遺事)’ 제1권 <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赫居世王)>조에는 소벌도리(蘇伐都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한(辰韓) 땅에는 예로부터 여섯 촌(村)이 있었으니, …… 2.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이니 촌장(村長)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사량부(沙梁部ㆍ梁은 道로 읽는다. 혹 涿으로 쓰나 역시 道로 읽는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된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고 하는데 구량벌(仇梁伐)ㆍ마등오(麻等烏)ㆍ도북(道北)ㆍ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가 둔 것이니 다음도 같다). …… 4. 취산 진지촌(珍支村ㆍ혹 賓之라 하며 또 賓子 또는 氷之라고도 한다)이니 촌장(村長)은 지백호(智伯虎)다. 처음 화산(花山)에서 내려왔으니 이는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고 하는데 시파(柴杷)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崔致遠)은 이 본피부(本彼部) 사람이었다. 지금 황룡사(黃龍寺) 남쪽과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 터가 있어 최후(崔侯)의 옛 집이라 하니 분명하다.”(辰韓之地 古有六村 …… 二曰突山高墟村 長曰蘇伐都利 初降于兄山 是爲沙梁部<梁讀云道 或作涿, 亦音道> 鄭氏祖今曰南山部, 仇良伐 麻等烏 道北 廻德 等南村屬焉<稱今曰者 太祖所置也下例知> …… 四曰취山珍支村<一作賓之又賓子 又氷之>, 長曰智伯虎 初降于花山 是爲本彼部崔氏祖 今曰通仙部 柴巴等東南村屬焉 致遠乃本彼部人也今皇龍寺南味呑寺南有古墟 云是崔侯古宅也)

위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는 진지촌(珍支村) 촌장(村長) 지백호(智伯虎)는 최씨(崔氏)로, 고허촌(高墟村) 촌장(村長) 소벌도리(蘇伐都利)는 정씨(鄭氏)로 되어 있으니,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의 기록과는 정반대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 정씨(鄭氏)는 경주(慶州)ㆍ고성(固城)ㆍ공산(公山)ㆍ광주(光州)ㆍ금성(錦城) 등 40여 본이 전하며, 중국에서 귀화한 경우인 서산 정씨(瑞山鄭氏)와 낭야 정씨(瑯揶鄭氏)를 제외한 정씨(鄭氏)의 대부분은 신라 6부의 진지촌(嘴山珍支村) 촌장 지백호(智伯虎)를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