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례/경주최씨

경주최씨가훈

docstory 2017. 2. 14. 23:55

慶州崔氏家訓
경주최씨가훈
 
願言利門 不使損遺體 身榮塵易染 心垢難洗 

원언경리문 불사손유체 신영진이염 심구난세


骨肉之間 愼勿責善 宗族之間 不可之怨怒 惟以親愛敦睦爲主.  

골육지간 신물책선 종족지간 불가지원노 유이친애돈목위주 


惟以責善 喜聞過爲心 

유이책선 희문과위심 

父母之得美味 人子所喜也 
부모지득미미 인자소희야 


凡人家父祖儀範 無一遵守 亦可謂其家之人乎 

범인가부조의범 무일준수 역가위기가지인호 

雖讀書家子侄 無小學之行 可見其徒尙虛文也     
수독서가자질 무소학지행 가견기도상허문야   

  
於 東文選

어 동문선


바라건대 이욕의 문을 막아, 부모께 받은 몸 상하게 하지 말라.

몸이 영화로우면 티끌에 물들기 쉽고, 마음의 때는 물로 씻기 어렵다.

부모형제 간에는 삼가 착한 일만 하라고 조르지 말고, 종족 간에는 원한이나 노여운 마음을 가져서는 안되고, 오직 사랑하고 화목함을 으뜸으로 하라.

친구들과 사귀어 놀때에는 오직 착한 일을 하도록 권장하고, 나의 잘못한 일의 충고를 즐겨 듣고 이를 마음속에 명심할 것이다.

부모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얻는 것은 자식으로서 기쁜 일이다.

한집에서 조상들이 마련한 예의범절을 한결같이 지키지 않는 것도 또한 그 집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책을 읽는 집안의 자손이라도 소학에서 공부한 행실을 하지 않으면 그들은 오히려 글을 배운 것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동문선에서.


지은이: 최 치 원 (崔 致 遠

857년 신라 헌안왕1년 生 학자. 경주 최씨의 시조.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869년 당나라에 유학하여 874년 과거에 급제하고 선주표수현위(宣州漂水顯尉)가 되고,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御袋)를 하사 받았다. 879년 황소(黃巢)의 난에 제도해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서기(書記)의 책임을 맡았다. 당시의 표장, 서계, 격문은 모두 그의 손으로 지어졌으며 특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으로 알려졌다. 885년에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이 되었으나 국정의 문란함을 통탄 외직을 청원하여 대산, 천령, 부성등의 태수를 지냈다. 893년 견당사에 임명되었으나 도둑이 횡행하여 가지 못하고 이듬해 시무 십여조를 상소하여 시행케 하고 아찬이 되었다. 그후 난세를 비관하여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글씨를 잘 썼다. 그의 난랑비서문은 신라시대의 화랑도를 해설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있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행, 문창후에 추봉 되었다. 조선시대 태인의 무성서원, 경주의 서악서원, 함양의 백연서원, 영평의 고운영당 등에 제향. 글씨로는 숭복사비문, 진감국사비문, 지증대사적조탑비문,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문, 사산비문 등이 있고, 저서로는 계원필경, 중산복궤집, 석순응전이 있다.